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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전시실은 고대로부터 해방 이전까지 제주교육의 흐름을「제주교육의 뿌리」라는 주제로 19개 코너에 전시하고 있습니다.
전시코너별 자료로는 우선 홍화각기에서부터 제주도를 나타내는 고지도인 한라장촉, 제주교육의 흐름을 개괄하여 보여주는 전시판넬과 고대로부터 해방 이전까지의 제주교육의 역사를 도표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고대의 제주교육과 탐라시대의 교육, 고려시대 및 조선시대의 교육코너가 마련되어있고, 서당을 재현한 제주 전통초가의 모습과 조선시대 국립교육기관인 향교의 모형도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향교 관련자료와 영운공 고경준 선생의 유품, 조선시대의 사회교육,제주도의 사학, 조선시대의 시취제도, 근대학교의 태동, 일제하의 식민지 교육, 등기구 및 도량형 기구, 근대학교 태동 이후 학생상, 일제하의 민족교육 및 사회교육 총 528점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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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의 제주교육
탐라는 신라 신문왕 4년(684) 신라에 사신을 보내 이두문을 배워 오게 하였다. 이것이 문자교육의 시작이다. 그 결과 고려시대에 들어오면, 탐라성주 고자견의 손자 고유의 남성시 장원과 예부시 합격, 고조기의 손자 고적의 예부시 합격 등으로 중앙 조정에 등용되기도 하였다. 고려 후기에는 삼별초의 영향으로 토목 · 건축 · 양잠 · 직조, 특히 마필사육의 기술교육이 이루어졌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면, 향교나 서원을 통한 교육이 유배인이나 목민관 그리고 제주출신 유학자들에 의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외에도 정문정책을 통한 효자 열녀에 대한 포상, 무속 근절을 위한 풍속 교화 등의 사회교육과 관련된 목축기술, 농업기술, 관망공예 등 기술교육 활동도 지난 시대보다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제주는 기후가 따뜻하고 한라산 산록(山麓)에 펼쳐진 광활한 초원지대에 수초(水草)가 풍부하며 맹수(猛獸)가 없으므로 우마의 번식에는 최적지였다. 원(元)이 제주를 지배하면서 충렬왕 2년(1276)원에서 말 160필을 가져온 것이 본격적인 목마의 시작이었는데 당시의 목마장은 해안 평야 지대이었으므로 민가의 농작물에 피해가 많았다. 그러므로 세종 11년(1429)에 고득종(高得宗)이 목장을 한라산 산록(山麓)으로 옮기어 축장(築墻)하도록 건의하여 10소장으로 나누었다. 목장 관리의 총책임자는 제주목사이고, 제주판관, 정의현감, 대정현감은 감목과(監牧官)직을 겸임하였다. 감목관 밑에 우마 사육을 직접 담당하는 목자(牧子)가 있었다. 군두(群頭)는 목자 중에서 성적이 우수한 자로 임명하는데 50필을 둔마(屯馬) 단위로하여 2명의 목자(牧子)가 사육을 책임졌다. 각 둔마의 군별은 천자문(千字文) 글자를 낙인(烙印)으로 사용하였는데 제주목에는 38자(字), 정의현에는 17자, 대정현에는 3자를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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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당
서당은 일반서민 자제들의 교육을 위하여 설립 운영되는 사설 초등교육시설로써 기초적인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학습의 도량(度量)이다. 서당의 설립과 운영 및 폐지는 자유로우나 교육과정은 일정한 규칙이 있었다.
서당의 인적 구성은 소규모인 경우 훈장 - 학동. 대규모인 경우는 훈장 - 접장 - 학동으로 구성된다. 입학은 6~7세에 자유롭게 하였으며, 졸업은 그 서당에서 배울만큼 배우면 졸업하게 되었다. 또한 서당 교육내용은 강독, 제술, 습자의 세가지로 나누었다. 강독이란 한문을 읽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으로, 천자문, 동몽선습, 통감, 소학, 사서삼경, 사기, 당송문, 당률 등이고, 제술은 시문을 짓는 것으로 당음(唐音), 고문진보, 두울등 교재가 있다. 습자는 문자를 익히며 기술할 수 있는 증력을 배양하는 것으로 처음에는 해서를 다음에는 행서, 초서를 익히게 했다. 마침내 서당은 1876년 개항과 1910년 한일 합방으로 국권이 침탈되고, 1918년 서당 규칙이 제정되면서 개량서당으로 전환되어 일어와 산술 등을 가르치도록 하다가 1929년에 서당교육을 마감하게 되었다. 평가표시는 대통, 통, 약통, 조통, 미만 5단계로 구분하여 조통, 미만은 불합격이다. 또한 이러한 5등급 평정방법에는 순, 통, 약, 조, 불의 방법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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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향교
향교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교육기관으로서 모든 군현에 설립된 유일한 관학이며, 인재양성을 위한 교육장소이다. 또한 당, 동 · 서재(齋)의 학교가 기본구조로 되어 있었다. 제주도에는 태조 원년(1392)에 학교가 세워졌고, 태조 3년에 교수관(交綏官)을 두어 10세 이상의 자제들을 교육시켜 국시(國是)에 나가게 하였다. 그후 태종 16년(1416)에 현(縣)이 분치(分置)되어 제주목에 제주향교, 정의현에 정의향고, 대정현에 대정향교가 설립되었다. 향교의 직제를 보면 제주목은 교수(종6품) 1인, 훈도(종9품) 1인, 장의 2인, 유사 4인이 있고, 양현에는 훈도 각 1인, 장의 2인, 유사 2~4인이 있어서 교훈을 담당하였다. 교육과정은 시문(時文)을 짓는 사장학과 유교의 경전을 공부하는 경학(經學)을 내용으로 한다. 이외에 소학, 심경, 근사록, 가례 등이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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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시취제도
 조선시대에는 과거를 통해 인재를 등용하였는데 문과(文科)에는 생진과(生進科)라고 하는 소과(小科)와 문과라 부르는 대과(大科)가 있었고 소과는 초시(初試), 복시(覆試)의 2단계 대과는 초시, 복시, 전시(殿試)의 3단계가 있어 원칙적으로 이 5단계를 통과해야만 관계 진출이 가능하였다. 제주인들은 여러 환경적, 경제적 여건 때문에 과시를 통해 중앙 관계에 진출하기가 어려웠다. 제주인들의 불이익을 고려하여 조정에서는 어사를 파견해 특별히 외방별시(外方別時)를 본다든가 문과초시 1인을 할당한다거나 또는 소과 초시를 제주 관아에 위임하기도 했다. 무과 향시는 전라도에서 3인을 할당받아 제주도에서 열렸는데 국방상의 필요에 따라 인원의 증감이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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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화 시대의 교육
1876년 개항과 1894년 갑오개혁을 거치면서 서구의 신문물이 들어왔다. 따라서 교육에도 근대적인 학교기관과 제도가 등장하고 개화사상과 같이 신교육사상이 소개되었다. 외국사조가 유입되면서 인간의 평등관에 입각한 새로운 교육관이 태동되는 시기이고 의무교육, 여성교육, 기술교육이 지지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제주도에서는 1906년 8월에 윤원구 제주군수가 부임하면서 초등은 1907년 제주목의 객사였던 영주관(瀛洲館)을 개축하여 제주공립보통학교를 설립하였고, 중등은 1907년 사립 의신학교가 보통과와 고등과로 개교되었으며, 이어 1910년 공립 제주농림학교가 설립되어 사립 의신학교 학생을 흡수하였다. 또한 1908년 사립학교령에 의하여 1909년 여성교육기관인 사립 신성여학교가 프랑스 선교사에 의해 설립되어 초등과정 4년, 중등과정 1년을 이수토록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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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의 교육
일제는 제국주의적 침탈을 통해 천황숭배와 군국주의를 결합한 국가신도(國家神道)를 앞세워 식민지 교육을 강행하였다. 제주도에서 일제는 토지조사사업을 벌이고 행정구역을 개편함으로써 식민지 교육여건을 조성하였고 그 바탕위에 공립보통학교나 공립농업학교 등의 학교제도를 정비하였다. 3 · 1운동으로 일제가 잠시 유화적임에 따라 제주도에서도 이 기간 많은 학교를 설립하고 실력양성운동을 위한 노력들을 하게 되지만 이후 일제의 제국 신민화 정책은 더욱 집요하고 철저해짐으로써 결국 해방되기까지 민족적 기반을 유린당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야학이나 비밀결사를 통해 민족주의적 교육전통을 고수하고 나아가 민족교육운동 차원에서 반일운동을 펼침으로써 끝내 제주도 특유의 교육적 결속을 유지해 나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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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의 민족교육
일제하 제주도의 민족교육운동은 1919년 3월 21일 조천만세운동을 기점으로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김성숙(金成淑)의 주도로 1921년 가파도에 설립되었던 신유의숙(辛酉義塾)이 대표적이었다. 교사들에 의해 부녀회, 청년회, 샛별소년회가 조직되었고 문맹퇴치를 위한 토요야학을 하는 등 민족주의적 성격이 매우 강하였다. 민족교육운동으로 가장 광범위하게 전개된 것은 야학운동이었다. 김녕리의 연경야학, 함덕 협성청년회가 조직한 노동야학, 상도리의 상도야학회, 온평리의 야학소, 조수리 야학등 진보적인 의식을 가진 제주 청년들이 노동야학을 개설, 교사로 참여하여 문맹퇴치를 기조로 민족교육에 헌신하였다. 1929년 당시 구좌면 동복리에 거주하는 15세 전후의 소녀들이 야학할 목적으로 조직되었으며 이 모임에서의 교사들은 항일 투사로서 계몽과 민족정신 고취에 주안을 두어 가르쳤고 이 소녀들을 통하여 항일운동가의 비밀 연락을 취하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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